엄마의 티타임, 모든 찻잔은 나를 향한다
작성자
고수리
작성시간
2019-05-30
작성시간
업데이트 : 2019-05-30
조회수
114

엄마에게 가장 정신없는 시간은 아침이 아닐까 싶다. 요즘 나의 아침은 이렇다. 가장 먼저 일어나 아이들을 씻기고 먹이고 챙겨서 어린이집에 등원시킨다. 부쩍 자아가 강해진 아이들은 ‘아니’ ‘싫어’라는 말을 연발하고 이유를 알 수 없는 떼를 쓰거나 고집을 피우기 일쑤다. 그런 아이들을 어르고 타일러 등원시킨다. 말로는 간단한 일 같지만 사실 엄청난 에너지를 쏟는 일이다.



집에 돌아오면 그야말로 난장판. 나는 라디오를 켠다.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킨다. 집안을 정리하고 청소기와 세탁기를 돌린다. 그리고 물을 데워 커피 한 잔을 탄다. 고요한 집안에 선선한 바람과 라디오 소리가 떠다닌다.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신다. 맛있는 음식을 한 입 먹었을 때처럼 ‘아!’ 하고 감탄사가 나올 것만 같다. ‘아! 행복하다’하고. 이런 소소한 행복을 느낄 때마다 나도 엄마 다 됐다고 실감한다. 티타임은 엄마에게 아주 소중한 시간이라는 것도.



어린 시절, 엄마가 집안일 마치고 혼자 커피를 마실 때면 엄마에게는 어떤 분위기 같은 게 생겼다. 여유롭고 편안하고 우아한 엄마. 창밖을 보며 커피를 마시는 엄마가 왠지 낯설면서도 멋지게 느껴지곤 했다. 바쁜 일상과 살림을 해치우고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시는 동안 엄마는 마음껏 행복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어째서 우리 엄마가 그리 찻잔을 아꼈는지도 이제 알 것 같다. 아무래도 행복한 시간이지만, 얼마 전부터 나에게 이 시간은 조금 더 행복해졌다. 좋아하는 찻잔이 생겼기 때문이다.



얼마 전 친정엄마와 폴란드 핸드페인팅 찻잔을 구경했다. 두 손에 쏙 들어오는 항아리 모양의 도자기 잔. 표면에는 알록달록한 색깔들로 꽃이나 과일들이 독특한 문양과 함께 그려져 있었다. 찻잔을 좋아하는 엄마에게 나는 가끔씩 폴란드 찻잔을 선물하곤 했다. 이번에도 엄마에게 선물할 요량으로 같이 찻잔을 구경했다. “이거 예쁘다.” 엄마는 파란 꽃이 그려진 찻잔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나를 보며 말했다.



“딸, 찬장에 예쁜 잔이 하나도 없더라. 이참에 엄마가 하나 선물해줄게.”



우리는 서로에게 찻잔을 선물하기로 했다. 왠지 의미 있는 선물이 될 것 같았다. 찻잔 하나씩을 골라 따로 계산하고 포장한 잔을 서로에게 건넸다. 엄마는 나에게 파란 꽃이 그려진 잔을, 나는 엄마에게 다홍 꽃이 그려진 잔을 선물했다. 선물 받은 잔을 꺼내 들어 보았다. 파란 꽃들이 나를 보며 수수하게 피어있었다. 어느새 나도 찻잔이 예뻐 보이는 나이가 되었구나. 빙그레 웃었다.



떠오르는 책이 있었다. <먹고 마시고 그릇하다>라는 책에서는 핸드페인팅 찻잔에 대해 ‘사람이 그린 그릇은 모두가 세상 유일한 존재’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엄마와 나는 아주 특별한 선물을 주고받은 셈이었다. 세상 유일한 찻잔을 하나씩 나눠 가졌으니까.



이후로 나는 아침 티타임이나 글 쓰고 책을 읽을 때, 엄마가 선물해준 찻잔에 따뜻한 커피나 차를 마신다. 겨우 찻잔 하나 생겼을 뿐인데 그 시간이 더 특별해졌다. 항아리 모양의 찻잔을 양손으로 감싸 쥐고 천천히 차를 마신다. 도자기 잔이라 차가 금방 식지 않고 손도 따뜻하게 데워준다. 잔을 둘러 동그랗게 감싸 쥔 부드러운 모양과 두툼한 두께, 적당한 묵직함이 좋다. 차를 마시는 동안 찻잔은 언제나 나를 향해 있다. 마치 나를 위로라도 하듯이.



모든 찻잔은 나를 향한다. 무언가 해야만 하는 일들에 둘러싸여 있을 때, 차를 불어 마시며 잠시 나 자신의 모습을 본다. 나 스스로를 먼저 살피는 시간. 그 시간이 끝나야만 잔에서 시선을 거두어 내 앞의 상대방에게 눈을 옮길 수 있다. 결국 우선순위는 나다. 자신이다. 온 세포 하나하나가 잠시 잠깐 모두 나를 향한다. 찻잔이 좋고, 차를 마시는 시간이 소중한 건 결국 나를 향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 김율희 <먹고 마시고 그릇하다> 중에서



처음으로 좋아하는 찻잔이 생겼다. 좋아하는 찻잔이 생긴다는 건 나만의 시간이 생긴다는 것이었다. 유명한 브랜드에 디자인이 세련되거나 값비싼 잔은 아니지만, 누군가 정성으로 그린 잔이자 엄마에게 선물 받은 유일한 잔이다. 오늘도 좋아하는 찻잔에 커피를 마시며 생각했다. 멀리 떨어져 사는 친정엄마도 내가 선물해준 잔으로 나와 같은 시간을 보낼 것이다. 바쁘고 정신없는 시간들 틈에서 잠시 잠깐, 찻잔을 손에 든 우리의 시간이 행복했으면. 따뜻했으면 좋겠다.



고수리 | brunch.co.kr/@daljasee

 KBS 〈인간극장〉, MBC 〈TV 특종 놀라운 세상〉에서 방송작가로 일했다. 카카오 브런치에 에세이를 연재하고 있으며 제1회 브런치북 프로젝트에서 금상을 수상했다. 첫 책 <우리는 달빛에도 걸을 수 있다>는 독자들의 따뜻한 사랑을 받으며 ‘세종도서 문학나눔’ 도서로 선정됐다. 지금은 어린이 콘텐츠 채널 <토닥토닥 꼬모> 작가, 글쓰기 안내자로 활동하며 남편과 쌍둥이 두 아이와 일상을 함께하고 있다. 저서로는 에세이 <우리는 이렇게 사랑하고야 만다>, <우리는 달빛에도 걸을 수 있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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