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00만 원 빚진 하버드 예술가
작성자
윤석진 기자
작성시간
2020-05-08
조회수
23

출처 : 클립아트코리아


하버드 대학원에 입학할 때만 해도 모든 게 잘 풀릴 줄 알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졸업과 동시에 학자금 대출 폭탄이 떨어졌다. 명세서에는 7만 8,000달러(9,600만 원)이란 비현실적인 숫자가 찍혀 있다. 12년간 극단에서 일해 받은 수입 중 일부를 학자금 대출을 막는 데 썼지만 아직 6,000만 원이 남아 있다. 부업으로 스타벅스 서빙과 카멜 담배 광고 전단지를 나눠 주는 알바를 병행했음에도 빚더미는 철옹성 같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속담이 빚 갚을 기간이 길다는 말로 들린다.

 

하버드 Master of Fine Art(MFA; 예술학 석사)를 졸업한 학생의 실제 이야기다. 아니 졸업한 지 12년이 흘렀으니 서른을 훌쩍 넘긴 직장인의 인생 경험담이라고 하는 게 맞을 듯하다. 예술혼에 젊은 날의 열정을 바쳤지만 나이 들어 현실의 벽 앞에 부딪힌 예술가들. 이런 사례는 수없이 많다. 학자금 대출이 예술학도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이들의 상황은 특히 심각하다. 예술을 배우기 위해 지출한 돈에 비해 버는 돈이 너무 적다. 경제학적 측면에서 투자 대비 효과를 따져 봤을 때 동급 학위인 MBA(경영학 석사)에 한참 뒤처진다.

 

지난 2017년 하버드가 MFA 과정을 잠정폐쇄하기로 한 것도 이 때문이다. 2018년부터 3년간 신입생을 받지 않기로 했다. 지금은 ▲학생 지원 확대 ▲시설 개조 ▲학위 가치 상승을 모토로 한 내부 개혁 절차를 밟고 있다. 장학금이나 외부 지원 유치를 통해 학생의 비용 부담을 줄여 준다는 취지다. 그러나 학자금 대출 문제는 단순히 학비만의 문제가 아니다. 예술의 시장 가치가 높아지지 않는 한 배고픈 예술가들은 계속 양산될 수밖에 없다.

 

시장 가치는 수요와 공급을 따른다. 공급이 많으면 가격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MFA 출신 예술가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은 이런 면에서 좋지 않은 신호다. 대형 미술관, 지역 아트센터 같은 몇몇 좋은 직장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격화되면서, 예술계에도 학력 인플레가 심화되고 있다. 이 경쟁에서 탈락하면 소극장이나 동네 학원을 전전해야 한다. 토니상 수상자인 다이앤 폴루스(Diane Paulus)는 뉴욕타임즈(NYT)와의 인터뷰에서 “대다수가 비영리 극장에서 예술의 경계를 넓히는 일을 하고 있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예술이 어떻게 가치를 얻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예술이 4차 산업혁명의 핵심 분야로 떠오른 이때, 배고픈 예술가 이야기는 이질감을 일으킨다. 인공지능(AI) 기술이 발전하면서 예술의 중요성은 날로 높아지고 있다. AI에겐 없는 창의성을 길러 주는 핵심 수단이기 때문이다. 하버드, 스탠퍼드, 케임브리지 같은 명문대들이 예술 교육을 강화하는 이유다. <미술관에 간 지식인> 시리즈도 예술의 중요성을 방증한다. 7권으로 구성된 세트는 미술관에 간 물리학자, 화학자, 수학자, 의학자 등으로 구성됐다. 지식인들이 하나같이 미술관에 찾아간 이유는 자기 분야를 넘어서는 영감을 얻기 위해서다. 오늘날의 예술은 모든 지식인들의 뮤즈다.

 

기업도 예술과 사랑에 빠졌다. 제품과 서비스에 예술적 감수성을 덧입히는 작업이 곳곳에서 진행 중이다. 예술에 기반한 경영인도 각광받는 모습이다. 세계적인 미래학자 다니엘 핑크(Daniel H. Pink)는 2017년 <하버드비즈니스리뷰>와의 인터뷰에서 “MFA는 새로운 MBA로, 미래 경제를 이끌어갈 창조적 기반”이라며 기업들이 차세대 경영인으로 MFA 출신들을 영입할 것으로 내다봤다. 실제로 글로벌 기업에는 MFA 출신이나 최고디자인경영자(CDO)가 요직에 자리하고 있다. 단, 이런 사례는 아직 극소수에 불과하다. 예술을 중시하는 사회분위기가 형성되긴 했지만, 그에 걸맞은 금전적 대우를 해주는 곳은 아직 드문 것 같다. 창의성의 보고, 융복합 대상 1순위인 예술과 예술가에 대한 재평가가 시급해 보인다.


 

윤석진 기자 | drumboy2001@mtn.co.kr

머니투데이방송 교육산업 담당. 기술 혁신이 만드는 교육 현장의 변화를 관찰합니다. 쉬운 언어로 에듀테크 사업 동향을 가감 없이 전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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